2024년 3월, 다섯 명의 이름 없는 소녀들이 데뷔했다. 소속사 더뮤즈엔터테인먼트는 리센느(RESCENE) 한 팀만을 보유한 작은 기획사였다. 1년여가 지난 2026년, 이들의 '러브 어택'은 멜론 톱100 차트 5위에 올랐고, '거제 야호' 밈은 전 세대를 아우르는 문화적 유행이 되었다. 우리는 이 장면을 두고 '중소돌의 기적'이라 부른다. 그러나 그 '기적'이라는 수식어 뒤에는 우리 사회가 직면한 더 근본적인 물음이 숨어 있다.
제작비 20억의 벽
몇 년 전만 해도 1억 5천만 원이면 괜찮은 뮤직비디오를 찍을 수 있었지만, 요즘은 4 ~ 5억 원, 신경을 좀 썼다 싶으면 8억, 10억까지도 든다. K팝 뮤직비디오 제작비는 팬데믹 이후 30% 이상 급등했고, 대형 그룹은 곡당 10억 ~ 20억 원을 기본으로 투자하는 시대가 되었다. 세트 자재비와 인건비 상승, CG와 군무 연출의 고도화가 그 배경이다.
그러나 2023년 기준 대기업의 연간 음악 제작비는 평균 431억 원이었던 반면, 중소기업은 평균 14억 9천만 원에 그쳤다. 해외 공연 횟수는 대기업이 연 83.4건, 중소기업이 4건으로 20배가 넘는 격차를 보인다. 여기에 뮤직비디오 한 편당 10억이 기본인 시대에, 중소 기획사가 감당해야 할 제작비는 이미 '시작 가격' 자체가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
냉혹한 숫자들 — 얼마나 많은 아이돌이, 얼마나 적게 살아남는가
여기서 문제를 좀 더 구체적인 숫자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대중문화예술산업 실태조사에 따르면 소속 연습생을 보유한 기획업체 기준 전체 연습생 규모는 약 1,671명에 달하며, 이는 이전 조사 대비 231명, 16% 늘어난 수치다. 연습생 수는 계속 늘어나는데, 정작 데뷔로 이어지는 비중은 오히려 하락하는 추세다. 즉, 아이돌을 꿈꾸는 인구는 매년 두꺼워지는데, 그 깔때기의 출구는 점점 좁아지고 있다는 뜻이다.
실제로 최근 1년(2024년 12월~2025년 11월) 사이 국내에서 정식으로 데뷔한 아이돌 그룹은 보이그룹 18팀, 걸그룹 16팀, 혼성그룹 1팀으로 총 35팀에 불과했다. 수천 명의 연습생, 수백 개의 기획사 지망생 풀 중에서 한 해에 세상에 이름을 알리는 팀은 고작 35개 남짓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이 35팀 중에서도 대중이 이름을 기억하고, 음원 차트에 이름을 올리고, 두 번째 앨범을 낼 기회를 얻는 팀은 다시 한 줌으로 줄어든다. 리센느의 '거제 야호'가 화제가 되기까지 338일이 걸렸다는 사실 자체가, 데뷔는 결승선이 아니라 또 다른 출발선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기에 숫자로 잘 잡히지 않는 층위가 있다. 데뷔에 이르지 못하고 연습생 생활을 그만두는 훨씬 더 많은 청소년·청년들이다. 아이돌 연습생은 빠르면 초등학교 고학년, 대개는 10대 중후반에 시작해 학업과 또래 관계, 때로는 진로 전체를 유예한 채 몇 년을 훈련에 쏟아붓는다. 그러다 데뷔가 무산되거나 회사 사정으로 팀 자체가 해체되면, 이들에게 남는 것은 '경력'이 아니라 '공백'이다. 계약을 중도에 그만둘 경우 그동안 들어간 레슨비·숙소비·식비 등을 위약금 형태로 되갚아야 하는 경우도 흔해, 많은 이들이 빚 아닌 빚을 안고 사회로 돌아온다. 또래들이 대학 입시나 첫 직장 경험을 쌓는 시기에, 이들은 '무엇이든 될 수 있었던 시간'을 '아무것도 되지 못한 시간'으로 되짚어야 하는 심리적 부담까지 떠안는다. 데뷔에 실패한 연습생들의 이후 진로가 학원 강사, 안무 강사, 보컬 트레이너 등 업계 주변부로 흡수되거나, 아예 연예계와 무관한 일반 취업 시장으로 늦게 재진입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은 업계 관계자들 사이에서 공공연한 이야기다.
문제는 이 좁은 문이 대형 기획사와 중소 기획사 사이에서 이중으로 작동한다는 점이다. 대형 기획사는 이미 인지도 있는 선배 그룹의 후광, 전국 단위·해외 단위의 캐스팅망, 오디션 서바이벌 프로그램이라는 노출 채널까지 갖추고 있어 우수한 지망생을 흡수하기 유리하다. 반면 중소 기획사는 상대적으로 실력 있는 지망생을 찾는 것부터가 어렵고, 어렵게 데뷔조를 꾸려도 성공 확률은 대형 기획사보다 훨씬 낮다. 결과적으로 같은 '아이돌 지망생'이라는 하나의 노동력 풀 안에서도 태생적인 기회 불평등이 발생하며, 이는 앞서 언급한 자본 격차와 정확히 같은 방향으로 겹쳐진다. 재능과 노력이 아니라 어느 회사 문을 두드렸는지가 생존 확률을 가르는 구조인 셈이다.
경제학의 시선, 자원의 배분과 혁신의 죽음
경제학은 자원이 희소할 때 어떻게 배분할 것인지를 묻는 학문이다. 그런데 K팝 시장의 자원 배분 구조는 '부익부 빈익빈'으로 수렴하고 있다. 대형 기획사는 막대한 자본을 동원해 화려한 뮤직비디오와 글로벌 마케팅을 펼치고, 이는 다시 팬덤과 수익으로 환원되어 선순환을 만든다. 반면 중소 기획사는 제작비조차 감당하기 어려워 첫 앨범이 마지막 앨범이 될 위험을 안고 있다.
경제학자 조지프 슘페터는 혁신을 '창조적 파괴'라 했다. 기존의 질서를 깨는 새로운 아이디어가 경제를 발전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나 K팝 시장의 현재는 '창조적 파괴'가 아닌 '자본에 의한 독점'에 가깝다. 혁신의 씨앗은 다양성에서 나온다. 다양한 기획사, 다양한 시도, 다양한 음악이 시장에 공급될 때 비로소 K팝 생태계는 건강하게 진화할 수 있다. 그런데 자본의 장벽이 너무 높아져, 중소 기획사의 실험과 도전은 애초에 경쟁의 장에 서는 것조차 어려운 현실이다. 혁신의 문이 닫힐 때, 시장 전체의 역동성은 죽는다.
여기에 한 가지 논지를 더하고 싶다. 매년 30여 팀 안팎만이 데뷔하는 좁은 시장에서, 대형 기획사들은 사실상 서로 다른 '세대'와 '카테고리'를 선점하며 과점 구조를 굳혀가고 있다. 아이돌 데뷔는 한 번 실패하면 재도전 기회 자체가 극히 제한적인 '승자독식형' 경쟁이다. 이런 구조에서는 실패의 비용이 개인과 소형 자본에게 고스란히 전가되고, 성공의 과실은 이미 자본을 가진 쪽으로 집중된다. 경쟁이 치열하다는 말이 흔히 '노력하면 이긴다'는 의미로 오독되지만, 실제로는 애초에 경쟁의 룰 자체가 자본 규모에 따라 비대칭적으로 설계되어 있다는 점을 직시해야 한다.
사회학의 시선, 계층 이동의 사다리가 끊어질 때
2025년 한국 사회 조사에 따르면, 세대 간 사회이동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29.8%에 불과하다. 10명 중 6명은 계층 상승이 어렵다고 답했고, 본인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상승할 가능성을 낮게 보는 비중은 57.7%에 달한다. '열심히 일하면 성공한다'는 믿음은 무너지고 있다.
사회학 연구는 사회 이동성이 낮은 사회일수록 구성원들의 미래에 대한 투자 의지가 감소한다고 말한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계층을 넘을 수 없다면, 왜 교육에 투자하고, 왜 위험을 감수하고 창업하며, 왜 오늘의 고통을 감내하고 내일을 준비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사라질 때, 사회는 동력을 잃는다.
리센느의 성공은 '개천에서 용이 났다'는 감동을 준다. 그러나 그 '기적'이 특별한 사례로 남을수록, 우리 사회의 계층 이동 사다리는 그만큼 더 좁아지고 있음을 방증한다. 기적은 반복되어야 제도가 된다. 기적이 기적일 때만 존재한다면, 그것은 사회가 실패했다는 증거다.
아이돌 연습생 시스템은 이러한 계층 이동 서사가 압축적으로 재현되는 무대이기도 하다. '연습생'이라는 위치 자체가 한때 청소년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자 계층 상승의 지름길처럼 여겨졌지만, 정작 그 사다리에 올라탄 이들 대다수는 몇 년의 시간과 청춘을 투입하고도 데뷔라는 결승선 근처에도 가지 못한 채 내려온다. 사다리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그 사다리에 올라탔다가 떨어진 압도적 다수의 존재를 가려버리는 역설이 발생하는 것이다. 소수의 성공 서사가 화려하게 조명될수록, 다수의 실패와 방황은 통계 뒤에 묻혀 사회적으로 이야기되지 않는다.
뇌과학의 시선, 희소성이 만드는 인지적 리스크
하버드 대학의 경제학자 센딜 물라이나선과 프린스턴 대학의 엘더 샤피르는 '희소성(Scarcity)'이 인간의 인지 능력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했다. 그들은 자원의 희소성이 '인지적 대역폭(cognitive bandwidth)'을 갉아먹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돈이 없는 사람은 생존을 위해 하루하루를 겨우 버티는 데 모든 정신력을 소모하고, 그 결과 미래를 계획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하고, 장기적인 투자를 결정할 '정신적 여유'가 사라진다.
중소 기획사도 마찬가지다. 제작비를 마련하기 위해, 한 장의 앨범을 내기 위해, 단 한 번의 기회를 잡기 위해 모든 자원을 쏟아붓는다. 그 과정에서 혁신을 위한 여유, 실험을 위한 여백, 멀리 내다보는 전략은 점점 사라진다. 대형 기획사가 10개의 프로젝트 중 하나라도 성공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반면, 중소 기획사는 단 하나의 프로젝트가 실패하면 회사 전체가 무너진다. 이 극명한 차이는 '실패할 자유'의 차이이며, 이는 곧 혁신의 자유의 차이로 이어진다.
이 '인지적 리스크'은 회사 단위에만 부과되는 것이 아니다. 연습생 개개인에게도 동일하게, 어쩌면 더 가혹하게 부과된다. 데뷔라는 단 하나의 목표에 몇 년의 삶 전체를 저당 잡힌 청소년에게는, 그 목표가 실패했을 때를 대비한 '플랜 B'를 설계할 정신적 여유조차 허락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학업을 병행할 시간도, 다른 진로를 탐색할 여유도 없이 하나의 가능성에 올인해야 하는 구조 자체가, 실패 이후의 방황을 구조적으로 예정된 결과로 만든다. 이는 개인의 나약함이나 준비 부족의 문제가 아니라,애초에 '실패해도 괜찮은 완충지대'를 제공하지 않는 시스템 설계의 문제다.
그래도 리센느는 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센느는 해냈다. 그들은 대형 방송사의 고정 출연도, 수백억의 마케팅 예산도 없었다. 대신 유튜브와 SNS라는, 누구에게나 열린 플랫폼을 선택했다. 리더 원이와 멤버 미나미가 일본식 '갸루' 메이크업을 한 채 경남 거제를 여행하는 일상 콘텐츠는 온라인에서 화제를 모았고, '거제 야호'라는 밈을 탄생시켰다. 이 콘텐츠의 각 에피소드는 수백만 조회수를 기록했고, 음원은 338일 만에 톱100에 진입하는 역주행 신화를 썼다.
업계에서는 숏폼 플랫폼과 알고리즘 기반 소비 환경이 중소돌에게 새로운 기회를 만들었다고 분석한다. 과거엔 방송 출연과 대형 유통망이 필수였다면, 이제는 틱톡·유튜브 쇼츠·팬 편집 영상을 통해 작은 팀들도 글로벌 팬덤에 빠르게 노출될 수 있게 되었다. 기술 민주화는 자본의 장벽을 일부 허물었다.
다만 이 '기술 민주화' 서사에도 그늘은 있다. 숏폼 알고리즘이 열어준 문은 확률적으로는 여전히 매우 좁다. 매년 수십 개의 중소 기획사 그룹이 동일한 방식으로 숏폼 콘텐츠와 밈 전략에 도전하지만, 그중 실제로 대중적 반향을 얻는 사례는 손에 꼽힌다. 즉 '기회의 창구'가 넓어졌다는 것과 '성공 확률'이 높아졌다는 것은 다른 이야기다. 오히려 진입 장벽이 낮아진 만큼 경쟁에 뛰어드는 팀의 수 자체가 늘어나면서, 개별 팀이 주목받을 확률은 여전히, 혹은 더욱 낮아지는 역설도 함께 존재한다.
기적을 제도로 만들기 위해
문화체육관광부는 리센느를 포함한 10개 중소돌 그룹에 연간 최대 3억 원씩, 최대 3년간 지원하는 '중소기획사 글로벌 도약 지원' 사업을 시작했다. 이는 환영할 만한 변화다. 그러나 3억 원은 대형 기획사가 뮤직비디오 한 편에 쓰는 비용의 1/3에 불과하다. 지원의 규모와 지속성을 고민해야 할 때다.
더 근본적으로, 우리는 '기적'에 의존하는 사회에서 벗어나야 한다. 경제학은 다양성이 혁신의 원천이라 말하고, 사회학은 계층 이동이 사회의 활력이라 말하며, 뇌과학은 여유가 창의성의 조건이라 말한다. 리센느의 성공이 '기적'이 아니라 '당연한 결과'가 되려면, 자본의 장벽을 낮추고, 실패할 자유를 보장하며, 누구에게나 열린 기회의 장을 만드는 제도적 변화가 필요하다.
여기에 하나 더 강조하고 싶은 지점이 있다. 데뷔한 소수를 지원하는 정책만큼이나, 데뷔에 이르지 못한 다수를 위한 사회적 안전망도 함께 설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매년 수백~수천 명의 청소년·청년이 연습생 생활을 접고 사회로 돌아온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넌 실패했다'는 낙인이 아니라, 그동안 쌓은 무대 경험·체력·자기관리 능력을 다른 진로(문화기획, 안무·보컬 교육, 콘텐츠 제작, 스포츠·공연 산업 등)로 전환할 수 있는 재교육·진로전환 지원 체계다. 위약금 부담을 완화하는 표준계약 개선, 연습 기간 중 학업 연속성을 보장하는 제도, 계약 종료 후 진로 상담과 직업훈련을 연계하는 프로그램 등이 함께 논의되어야 소수의 '기적'뿐 아니라 다수의 '이후의 삶'까지 책임지는 산업이 될 수 있다.
우리는 개천에서 용이 나는 사회를 원한다. 그러나 용이 나는 개천은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 개천을 깊게 파고, 물길을 트고, 용이 헤엄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은 우리 모두의 몫이다. 동시에, 그 개천에서 용이 되지 못한 채 물 밖으로 나온 훨씬 많은 이들을 위한 마른 땅도 함께 마련하는 것 — 그것이 진짜 성숙한 산업과 사회의 모습일 것이다. 리센느가 보여준 것은 기적이 아니라, 우리가 아직 포기하지 않아야 할 가능성이다. 그 가능성을 지키는 일, 그것이 바로 우리 사회의 미래를 지키는 일이다.
참고: 본문 중 연습생 규모·데뷔 비중(대중문화예술산업 실태조사 기반) 및 최근 1년 신인 데뷔 그룹 수(아이돌로지 집계) 관련 수치는 공개된 산업 통계 및 매체 보도를 참고했다.